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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박열 의사 가네코 후미코 사진 관동대지진 실화 프로필 도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3

블로그냥 2022. 3. 10.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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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가끔은 현실이 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영화로 만들어져서 또 한 번 시청자들의 감동을 주는데요. 이번에는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 이야기입니다. 

 

이미 영화 박열 최희서 이제훈 커플로도 많은 분들의 감동을 주었던 이야기입니다. 특히 가네코 후미코 (한국명 박문자) 여사 이야기가 가장 가슴아픈데요. 박열 아내 가네코 후미코 여사는 조국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한동안 인정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시간이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목차-

1.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9회

2. 박열 후미코 사진 실화

3. 가네코 후미코 프로필 도서

4. 꼬꼬무 시즌3 박열 의사

1.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9회

박열 후미코 사진박열 후미코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3 열아홉 번째 이야기 나는 승리자다 제국을 뒤흔든 사나이 박준식 박열 의사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꼬꼬무 박열 의사 이야기는 초등학생들의 손편지 요청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관동대지진이란?
간토대지진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도쿄도 등을 포함한 미나미간토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거대지진입니다. 
인명피해 사망 최소 105000여명, 이재민 수십만명 
관동대지진 진도 7.9~8.2

사망자만 10만 명이 넘는 끔찍한 재해인 관동대지진이지만 뜻밖에도 지진으로 인해 조선인 대학살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연 재해인 지진의 원인이 조선인에 있다고 하여 조선인이라면 몽둥이, 칼, 죽창으로 무차별적인 학살을 펼칩니다. 이따 나온 것이 바로 쥬고엔 고짓센 이야기입니다. 

 

쥬고엔 고쥬센이란?
쥬고엔 고짓센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돈 15엔 50전을 부르는 일본어입니다. 한국식 발음과는 다르게 일본식 발음은 확실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어처구니 없이 발음만으로 한국인을 구분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의 본성은 한일 합방이라고 하지만 결국 대한민국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죠. 무차별 적인 조선인 학살이 일어나는 그 시점에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며 항일 투쟁을 하던 조선인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박준식, 독립투사 박열 의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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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시간 10시 30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청률 5.5%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출연진 장도연 장현성 장성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게스트 19회 래퍼 치타, 배우 이동욱, 배우 박효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보러가기 웨이브 OTT 시청가능합니다. 

 

2. 박열 후미코 사진 실화

박열박열 의사 영화 박열

불도저 같은 성격으로 일제 앞잡이를 비롯해서 아나키스트로서 일본 천황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박열 의사는 갑작스럽게 일본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이유는 일본 황태자 암살 거사를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런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조선인 희생양이 필요했던 상황에 박열 의사를 그 본보기로 삼아 체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박열 부인 가네다 후미코 씨 또한 같은 동지로서 체포합니다. 가네다 후미코 여사는 일본인이었지만 오히려 조선인들에게 더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불우한 환경 탓에 출생신고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고 같은 일본인 조차도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차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들린 조선인 마을에서 오히려 더 따뜻하게 대해주어 일본보다 조선인들에게 더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1922년 3월 박열과 만난 후미코는 5월부터 동거에 들어갔고 박열과 함께 흑도회 멤버가 되었고 후에 홍진유, 박흥곤, 심염파, 서상일, 장상중 등과 흑우회에 김중한, 니야마 하쓰요, 구리하라 가즈오 등과 가입해 사회주의 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이후 1923년 남편 박열 의사와 함께 불령사 조직을 만들었고 현사회라는 제목의 잡지를 만들어서 글을 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가네코 후미코 여사와 박열 의사는 경찰에 연행되어 대역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박열 재판이 펼쳐졌는데 일본 재판 법정에 섰던 박열은 조선어와 함께 조선옷을 입고 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1926년 3월 26일 두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두 사람은 4월 5일 천황이 명하여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박열 후미코 두 사람은 옥중 결혼식을 올리며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네코 후미코 여사는 7월 23일 향년 23세 나이로 의문사하며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박열은 광복 이후 석방되어 한국인 여성과 재혼했지만 이후에도 가네코 후미코 여사의 기일마다 추모를 하며 그녀를 기렸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옥중에서 찍어서 유명해진 것이 바로 박열 후미코 사진 인데요. 영화 박열 에서도 이제훈, 최서희 두 사람이 그대로 연출해서 화제가 됐었습니다. 당시 다테마스 가이세이 판사에게 가족에게 사진을 남기고 싶다고 해서 찍었지만 마지막 순간 로맨틱한 모습을 연출해 화제가 됐었고 세상에 유출돼 판사가 해임됐던 사진입니다.

 

3. 가네코 후미코 프로필 도서

가네코 후미코영화 박열 최희서

가네코 후미코 출생 1903년 1월 25일, 가네코 후미코 사망 1926년 7월23일 향년 23세. 구로바네 형무소내에서 사망했으면 가네코 후미코 사망원인은 밝혀지지 않아습니다. 한국명 박문자 였으며 학력 충청북도 부강공립심상소학교 졸업했으며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다가 영화 박열 개봉한 다음해 2018년 무려 92년만에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사후에 옥중 수기들을 모은 가네코 후미코 도서 출판도 되었는데요. 가네코 후미코 책은 나는 나 등이 있습니다. 일본인이었지만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은 후미코 여사는 일본으로서는 그냥 두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국인도 친일파가 있었는데 일본인이 오히려 대한독립을 외쳤던 후미코 여사가 뒤늦게나마 인정을 받아서 다행아닌가 싶습니다. 가네코 후미코 여사 묘소는 박열 의사 고향 경상북도 문경 박열의사 기념관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4. 꼬꼬무 시즌3 박열 의사

아나키스트, 독립투사, 불량한 조선 사람 박열 의사는 스스로 자신을 개새끼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후미코 여사 또한 박열의 그런 정신에 감명을 받아서 함께 했다고 합니다. 박열 의사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고 영화 박열 이야기도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다만 박열 의사가 생전에 남겼던 명언들만 다시 한번 새겨주셨으면 합니다. 

 

박열 명언 모음
1.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 사형선고를 받은 후 재판장에게
2. 나는 박열이다 -박열의 이름을 묻는 재판장에게 조선어로 답하며
3. 국민이 모두 서울에 남아 있는데 독립투사인 내가 그 사람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 -6 25전쟁 당시

영화 속 대사 같지만 실제로 박열 의사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들입니다. 그 어떤 영화 명대사보다 더 감명깊은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을 보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하는데요. 시대를 뛰어넘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아나키스트 박열 후미코 두 분 사후에나마 함께 하셨기를 바랍니다. 박열 후미코 여사의 19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시간 목요일 10시 30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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